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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헌(醉軒)

예천 감천 송은종가(醴泉 甘泉 松隱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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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취헌(醉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6.0x58.5x2.5
  • 건물명 취헌(醉軒)
  • 공간명 예천 감천 송은종가(醴泉 甘泉 松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예천 감천면 팔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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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헌(醉軒)

취헌(醉軒)


취헌(醉軒)은 조휘영(趙徽榮, 1805~1854)이 예천군 감천면 팔미리에 건립한 당호 편액이다. ‘취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그가 지낸 곳이 예천 고방산의 매암인데, 이곳의 산수를 사랑하여 실(室)을 매암유거(梅巖幽居)라고 이름 붙이고, 지내던 곳을 취헌이라고 하였다. 매암의 산수에 취(醉)해 은거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고방산의 바위매화
홀로 서 있는 매화나무 한 그루
타고난 자질을 세모 돼서 알았네
어여쁜 모습은 지킬 수 있어도
신중한 마음가짐 지니기 어렵네

孤芳巖梅
獨立一株樹
天姿歲暮知
娉婷能自守
約略若難持

이 시는 조휘영의 문집 맨 처음에 수록된 시로, 조휘영이 취해 살았던 고방산의 매화에 대해 지은 시다. 흔히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세찬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조휘영은 매화의 아리따운 모습이 아닌 오랜 인고 끝에 희망을 전하는 그 정신을 향유하고자 한 것이다. 글씨는 일가 어른인 이조참판 조형복(趙亨復, 1788~?)이 해서로 써 준 것이라고 한다.

멋지다. 지금 이 시대에 걸 맞는 현대미가 물씬하다. 작은 편액인데도 웅장하고 두툼한 필세가 가득 찬 맛이 있다. 醉에서 酉의 내부 공간 처리가 탁월하고 그 우측 卒도 내부를 넓고 넉넉하게 펼치고 종획을 짧게 처리한 결과 전체를 정방형의 글자 형태를 구성한 점이 평범함을 넘었다. 醉와 軒 두 글자는 형태로 볼 때 세로획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상투적인 화면이 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醉의 탁월한 구성을 통하여 단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화면을 연출하였다. 이렇게 편액의 생각을 읽어가다 보면 ‘醉軒’이란 단지 취해서 살기를 바란다는 단순한 의미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예천 감천 송은종가(醴泉 甘泉 松隱宗家) 소개


편액을 소유하고 있는 송은 종가는 바로 송은(松隱) 조현상(趙顯常, 1776~1861)의 집안을 말한다. 조현상의 자는 중경(仲卿), 호는 송은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부친은 조진정(趙晉貞)이고 모친은 순천장씨(順天張氏) 장지빈(張之(▼火+賓))의 딸이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고려 후기 첨의중찬을 지낸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한다. 대대로 관료를 배출해 서울에서 가문이 번창했는데,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양조씨 가문은 화를 입을까 우려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조지수의 9세손 조종(趙琮)은 처가가 있던 영주로 이거했다. 조종의 아들 조형완(趙亨琬)은 풍천면 도양 서택촌으로 이주했다. 조현상의 고조인 노천(蘆川) 조협(趙悏)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673)과 친분이 깊었다. 조현상은 부친상을 치른 뒤 팔미 마을로 옮겼다가 다시 감천면 증거리로 이주했다.

감천면은 고려 현종 때 안동부에 속해 단독으로 내려오다가 1896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예천군에 편입되어 감천면이 되었다. 감천면은 상관, 덕율, 하포, 현내, 대산, 이곡, 우곡, 유동, 석남, 미흘, 홍현, 천전, 오향, 직작, 오평, 증거, 산동, 돈답, 벌방, 수한, 장산의 22개의 동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보문면의 진양동, 평고리, 지과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14개 동으로 개편 관할했고, 1893년 보문면에서 마촌동을 편입해 15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증거리는 1895년 지방관재 개정에 의해 감천면에 편입된 곳이다. 이곳은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1720년 경 조현상이 입향하여 살았다. 높은 산 밑의 낮은 골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중산이라 부른다.

편액의 주인공인 조휘영(趙徽榮)은 자가 진오(愼五), 호는 취헌(醉軒),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휘영은 조종(趙琮)의 11세손으로, 조부는 조진정(趙晉貞), 부친은 조현상(趙顯常),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종행(金宗行)의 딸이다. 감천면 팔미리에 태어나 1836년 중산리 고방산(일명 주마산) 아래에 이주했다. 그곳 매암의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하며 「매암유거梅巖幽居」라는 시를 짓고 취헌이란 편액을 걸었다. 여기에서 사서삼경을 필사하여 산방과 절을 찾아 밤낮 공부를 계속하여 초시에 합격하였다. 1850년 전시(殿試)에 실패한 후로는 고향에 돌아와 문사들과 함께 시를 쓰고 술을 마시며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성품이 곧고 고상하여 향리사람들과 함부로 사귀지 않고 오직 속세를 떠난 고결한 선비들과 교유하며, 인륜에 돈독하였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회운(權會運)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두었는데, 조태익(趙泰翼), 조태두(趙泰斗), 조태영(趙泰榮)이다. 저술로 2권 1책의 『취헌유고醉軒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조휘영, 『취헌유고』.
  • 예천문화원, 『醴泉의 金石文1』, 예천문화원, 2003.
  • 예천군지편찬위원회, 『醴泉郡誌』, 예천군, 200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